무엇이든지 처음은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다. 그 경험이 좋았다면 상상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2017년, 레이오버를 통해 폴란드 바르샤바를 여행하며 유럽에 첫 발을 내딛었다. 꿈에 그렸던 동화 같은 유럽의 모습이 그대로 녹아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리투아니아에서 11개월을 생활하는 동안 이웃 나라 폴란드를 여행답게 여행한 적이 없었다. 다른 나라에 갈 때 폴란드의 공항을 이용하는 일이 간혹 있었는데, 그때 간단히 둘러보는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것이 진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지난 여름, 돌로미티를 여행한 이후 폴란드를 다시 찾았다. 그것도 44일이나 머무르는 일정으로. 예전에 제대로 여행을 못 했던 한을 다 풀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 당시 폴란드를 통해 유럽에 입국하며 좋은 인상을 받았고, 물가도 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저렴한 편이며, 한 국가에 오래 머무르고픈 욕구를 충분히 채울 수 있을 만큼 영토도 넓고 도시가 다양해 다닐 맛이 날 것 같았다.
이번에도 시작은 바르샤바였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넘어오는 항공편이 바르샤바가 도착지기도 하고, 나름대로 나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곳에서 초반 일정을 시작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도착 당일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빌라누프 궁전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벗어나 한산한 곳으로 접어든다. 바르샤바에는 도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센트럼 주변으로 역사 유적지와 관광지, 박물관 등이 모여 있어 대개 도보로 이동하거나 교통수단을 짧게 이용하면 그만이지만, 빌라누프 궁전은 도심에서는 약간 떨어진 곳이다. 바르샤바에는 왕의 길이라고 하여 올드 타운에서 남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그 끝을 장식하는 곳이 빌라누프 궁전이다. 버스를 타고 약 20여 분을 달려 정류장에 내리면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도심지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차가 쌩쌩 달려나가는 소리가 허공에 가득하다. 차 소리를 뒤로 하고 횡단보도를 건너 가면 녹음이 가득한 공간에 들어선다. 소박하지만 정갈하게 다듬어진 작은 공원 길은 궁전으로 향하는 통로이자 무더운 날 땀을 날려버리는 쉼터이기도 하다.
수년 전에 바르샤바에 왔을 때도 이 궁전을 방문했는데, 당시 방문객이 많지 않아 한산하게 둘러봤던 기억이 있다. 작은 공원 길을 통과하면 비밀스럽게 숨은 궁전 입구가 등장. 이날도 궁전을 찾은 사람들이 많이 없는지, 개찰구 앞 직원이 한가로이 기다리다 내가 다가가니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빌라누프 궁전은 크게 궁전과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통합권은 35즈워티고, 정원만 본다면 10즈워티이다. 궁전을 먼저 둘러보고 정원을 보는 게 일반적인 루트지만, 보이는 길을 따라 막 걷다 보니 정원을 먼저 둘러보게 되었다. 다시 찾은 정원은 예전과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빌라누프 궁전과 정원은 베르사유 궁전을 본따 만들어졌는데, 규모는 작지만 한적하고 아늑한 것이 마음에 드는 곳이다. 내가 사람이 없을 때만 찾아서 그런진 몰라도, 이번에도 한적하게 경치를 즐길 수 있어 좋았다. 연노랑 외관이 인상적인 궁전은 정원과도 잘 어울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풍경이다. 정원에는 형형색색의 장미와 모란꽃이 가득 핀 풍경이 마음을 순수하게 만들어 주는 듯하다. 그러나 따가울 정도로 뜨거운 햇살을 이길 수 없어 서둘러 궁전으로 들어갔다. 빌라누프 궁전을 정면에서 보면 ㄷ자를 시계 방향으로 90도 돌린 모양이다. 궁전 내부에서는 당시 왕과 왕비가 썼던 침실 등을 비롯해 다양한 전시를 볼 수 있는데, 외관만큼이나 화려한 실내의 캐비넷 등이 인상적이었다. 고개를 들면 천장을 가득 메운 그림이 고풍스러움을 한껏 올려줬다.
빌라누프 궁전을 둘러본 이후 다시 바르샤바 시내로 돌아왔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바르샤바 대학교 도서관이다. 도서관은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고, 건물 내부가 트여 있어 층고가 굉장히 높아 시원시원했다. 건물 자체도 눈길을 끌 만큼 특이한데, 옥상에는 더 특이하게도 정원이 있다고 한다. 폴란드에 도착한 직후 여행에 도움이 될까 싶어 현지 서점에서 폴란드어로 된 여행 책을 구입했는데, 거기에 이 곳이 소개되어 있었다. 아쉽게도 이 날 옥상정원은 문을 닫아 다다음날에 다시 찾았다. 정원에 들어가자 너른 잔디밭이 펼쳐졌다. 계단을 따라 도서관 위로 올라가자 아담한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망도 살짝 기대했지만, 그렇게 높지 않고 나무에 가려 건물들의 꼭대기 정도만 보일 정도였다. 정원 안에는 작은 연못도 있고, 도서관 건물 자체도 덩굴로 둘러싸여 있다 보니 도서관 안의 정원이 아니라 정원이 도서관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정원 자체는 평범하지만, 도서관과 만나니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머리가 아플 때 밖으로 나오면 바로 펼쳐지는 정원에서 바람을 쐴 수 있으니 이보다 더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 있을까 싶었다.
첫 날엔 문이 닫힌 정원을 보며 느껴지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문화과학궁전으로 향했다. 지금은 새로 들어선 바르소(Varso)에 밀렸지만, 이전까진 쭉 폴란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타이틀을 지켰다. 물론 지금도 바르샤바의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그러나 눈에 띄는 외관과는 다르게 많은 폴란드인들이 싫어하는 건물이기도 한데, 소련 스탈린의 지시로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폴란드와 러시아의 악연을 생각하면 십분 이해가 된다. 그러나 현재 문화과학궁전 안에는 공공기관과 문화시설들이 들어서 있고,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어 바르샤바의 일상에 자리를 잡은 존재가 되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0층에 위치한 전망대에 올라서면 안전망 너머로 바르샤바의 풍경이 펼쳐진다. 폴란드의 수도 답게 고층 빌딩도 흔하게 볼 수 있고, 현대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전망이 시야에 들어온다. 올드 타운은 거리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 옛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다소 아쉬움이 있었다. 이날 아침에 강한 폭풍우가 밤에 불어닥칠 거라는 예보가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멀리서 짙은 구름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만일을 대비해 전망 구경을 마치고 곧장 숙소로 돌아가 일정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