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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성 쑤저우(苏州)는 춘추시대 오(吳)나라의 수도였다.
춘추전국(春秋戰國)(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은 천자(天子)국인 주나라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수많은 나라들이 패권을 다툰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기원전 476년 또는 403년를 기점으로 후반기인 전국시대는 힘의 우열이 본격화된 약육강식의 사회였고 전반기인 춘추시대는 상대적으로 예의와 배려가 존재하던 시기였다.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던 변화기의 주인공은 오나라와 월나라였다.
춘추시대 변방국이었던 오나라는 합려가 왕이 된 후 인접국인 월(越)나라와 패권 다툼을 벌이며 중원 진출을 꾀했다.
하지만 오나라는 합려가 죽은 뒤 아들 부차 시대에 멸망했다. 화려한 꽃이 오래갈 수 없는 듯, 오나라의 영광은 너무나 짧았다. 그러나 이 시대에 와신상담(臥薪嘗膽), 오월동주(吳越同舟), 굴묘편시(堀墓鞭尸)등 수많은 고사성어가 탄생했고, 부차·구천·오자서·손무·서시·범려 등 매력적인 인물들이 넘쳐났다. 그래서 오와 월나라를 춘추시대의 백미로 꼽는 이들도 많다.
쑤저우에는 오왕 합려의 무덤인 호구탑(虎丘塔)이 있다.
보통 쑤저우에 오면 수향마을이나 졸정원 등 정원만 보고 가는데, 예전에도 그랬는지 북송 시대 시인 소동파는 "쑤저우에 와서 호구탑을 구경하지 않은 것은 매우 안타깝다"고 평가했다. 호구탑은 당나라 목탑양식으로 송나라 때 세워졌다. 팔각형의 7층 탑이다. 합려의 무덤은 탑 아래에 있다. 신기한 건 600톤이나 되는 탑이 조금씩 기울어져 지금은 2.5m나 기울어져있다는 사실이다. 비유가 과하지만 이곳을 중국의 피사의 사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쑤저우 도심 곳곳에 흐르는 운하를 지나면 얕은 언덕 위에 호구탑이 있다.
팔각형의 층마다 벽돌이 반듯하게 쌓아올려져 있고 층마다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은 호구탑의 매력을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튼튼한 기단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기울어져 있는 모습이 많은 상상을 불러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자신이 죽은 후 순식간에 망국의 길로 사라진 합려의 울분일까, 땅속에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는 그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탑돌이를 하며 2,500년전 사라진 한 영웅의 마음을 다독여본다.
호구탑 아래에 흐르는 운하
호구탑입구
정원의 도시답게 곳곳에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오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끈 춘추오패 오왕 합려의 무덤인 호구탑
신기하게도 호구탑은 기울어져있어, 중국판 피사의 사탑으로 불린다
합려(왕이 되긴 전 이름은 광(光))가 왕이 되는 과정은 드라마틱했다.
합려의 할아버지 수몽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넷째 계찰이 가장 현명했다. 수몽 역시 이를 알고 계찰에게 왕위를 넘겨주었으나 계찰은 첫째 제번이 장자니 그가 왕위를 받아야 한다고 사양했다. 제번은 마지못해 왕위에 올랐지만 계찰이 왕이 될 수 있도록 죽기 전 둘째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둘째 또한 셋째 동생 여매에게 왕위를 물려줬고, 셋째 역시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하지만 계찰은 이번에도 사양하자 셋째 아들인 주우(오왕 요)가 왕위를 잇게 된다.
광은 바로 첫째 제번의 아들이었다. 장자계승의 원칙으로 하면 그는 아버지를 이어 당연히 왕이 됐어야 했다. 이에 광은 불만을 품게 된다.
그는 뛰어난 지략가인 오자서와 요리사 전제를 식객으로 삼았다. 전제는 왕의 연회에서 생선 요리 안에 칼을 숨겼고, 광은 왕을 시해하는데 성공했다.
광은 합려로 개명하고 오자서와 손무 등을 기용하며 오나라의 힘을 키웠다. 하지만 기원전 496년 합려는 월나라를 공격하던 중 월왕 구천에 의해 전사했다. 아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매일 장작더미위에서 자며(와신, 臥薪) 구천에 대한 복수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구천을 생포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부차는 아버지의 능력은 절반밖에 갖지 못했던 듯했다. 구천을 포로로 잡은 뒤 승리에 도취되어 흐트러진다.
월나라 구천은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곰의 쓸개를 햩으며(상담, 嘗膽) 복수를 꿈꿨지만 겉으로는 부차의 비위를 맞췄다. 여기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이 탄생했다. 구천이 아픈 부차의 변까지 맛보자 부차는 구천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없앴다.
한술 더 떠 월나라 재상 범려는 미녀 서시를 부차에게 바쳤다. 서시의 역할은 오자서를 부처의 눈밖에 나게 하는 것이었다. 안그래도 부차는 아버지가 기용했던 오자서가 못마땅하던 차, 서시의 이간질에 넘어가 결국 오자서를 죽였다. 오자서까지 없어지자 구천은 이제 행동할 시간이라 여겼다. 구천은 부차를 죽였고 결국 오나라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복수심을 갖는건 쉽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복수를 한 뒤의 평정심이다. 와신상담은 복수심보다 나의 마음을 잡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호구탑 오른편에는 검지(劍池)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의 모양이 검처럼 생겼다는 설과, 합려의 시체와 함께 3천개의 검이 묻혀있다는 설이 있다. 후에 삼국시대 손권과 진시황이 명검을 찾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하나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오나라는 명검으로 유명한 곳이라 3천개의 명검이 발견된다면 쑤저우는 병마용갱의 서안(西安)보다 유명해질지도 모른다.
오나라 명검 3천개가 묻혀있는 전설이 있는 검지
다소 찾기가 어렵지만 맞은편에는 '손자병법'의 손무가 군사훈련을 했다는 손무정(孫武亭)이 있다.
손무는 오자서와 함께 합려를 부국강병의 길로 이끈 천재적인 병법가다.
합려는 처음에는 손무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합려는 장난삼아 그에게 궁녀들도 군사훈련을 시킬수 있냐고 물어봤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손무는 결연한 의지로 그 자리에서 천 여명의 궁녀들을 모았다. 엉겹결에 소집된 궁녀들은 장난으로 여기며 손무의 군령에 웃자 손무는 그 자리에서 합려가 아끼는 후궁 2명을 죽이고 만다. 놀란 궁녀들은 그때부터 일사분란하게 손무의 군령에 따랐고 합려 또한 손무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실제로 손무정에서 내려다보면 궁녀 천명이 훈련했다는 말이 사실일까 싶을 정도로 좁다. 관광지로 개발하며 지형이 달라진 탓도 있지만, 중국인들은 천(千)·만(萬) 등 숫자로 과대 포장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천명까지는 아니었겠지만, 많은 궁녀들이 이곳에서 손무의 명령에 떨었으리라 생각하면 이곳의 풍경이 사뭇 달라진다.
손무가 천명의 궁녀들을 훈련시켰다는 손무정
손무정에서 바라본 공간. 지금은 휴게공간이 됐다
놓치지 쉬운 또 다른 유적지가 있는데 바로 중앙광장에 있는 시검석(試劍石)과 천인석(千人石)이다.
중국은 돌을 자르며 명검을 테스트하는데 시검석은 합려가 자른 바위다. 천인석은 부차가 아버지 합려의 무덤 위치를 비밀로 하기 위해 작업에 동원됐던 인부 천명을 죽인 장소다(일설에는 고승의 설법을 천명이 들은 장소라고도 한다). 애꿎은 인부들이 죄없이 목숨을 잃었다니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이들의 삶은 안타깝기만 하다. 역시 천인석 또한 천명의 인부가 서있을 만큼 넓은 바위는 아니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합려가 내리쳤다는 시검석
부차가 아버지 합려의 무덤위치를 비밀로 하기 위해 인부 천명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천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