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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 주요 도시의 박물관, 기념관을 돌아보는 뮤지엄 투어
#14. 상해유태난민기념관
상하이에는 오직 상해에만 있는 가장 특이한 기념관이 하나 있다. 바로 상해유태난민기념관(上海犹太难民纪念馆)이다. 이는 1930년대 상하이가 얼마나 국제적인 도시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1938~1941년간 독일 나치의 학살과 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상하이까지 한 달 넘게 배와 기차를 이용하여 건너온 유대인 난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 상하이 경제·사회 한 축을 담당했던 조계 내 미국, 프랑스, 영국 등 국가의 영향력과 유태인 은행가 허야지(何亚基·Yasui He) 및 중국적십자사의 도움으로 상하이에 정착할 수 있었다. 상하이 훙커우 티란차오(提篮桥) 지역의 '무국적 난민 한정 거주지'에는 2만 명에 가까운 유대인 난민이 거주하며 현지 주민들과 어울리며 난관을 극복했다.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 식민지배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태인 난민은 살아남았다.
상해유태난민기념관 입구. 2023 Ⓒ 김동하
난민 수송 루트(항운 및 철도),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항해에 나섰던 기선들,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난민 휴대 물품들,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1933년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유태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당시 독일에는 50만명, 다수의 독일인이 거주하고 나중에 독일에게 합병당한 오스트리아에 20만명의 유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한 1939년이 되자, 독일의 유태인 탄압은 극에 달했다. 그들은 독일을 떠난다는 증명인 출국용 배(페리) 승선권이 있어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집단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난민이 휴대했던 독일 제국 마르크화,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난민 가방들,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주오스트리아 중국총영사 허펑산(何凤山) 흉상과 기념패,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난민 소지 독일 여권,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여권의 J 표시는 유태인(Jews)임을 나타내는 것임.
이에 많은 유태인들이 난민들이 되어 세계 각국으로 탈출하려 했지만 미국, 영국 등 선호하는 나라는 난민을 수용할 쿼터(수용 인원)가 많지 않았고, 나머지 선택지인 호주, 프랑스, 북유럽 국가들도 이들을 받아 들이기 주저했다. 이 시기 독일, 오스트리아 거주 유태인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이 상하이였던 것이다. 당시 상하이 행 페리(기선)은 이태리에서 출발했고, 이태리와 일본 선사 두 곳이 운영하고 있었다. 운 좋게 당시 500 마르크에 해당하는 고가의 승선권을 구입할 수 있었던 소수의 유태인들만이 1939년 4월, 상하이 행 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이들은 한 달간의 고난한 여정을 거쳐 상하이 항에 도착했다.
상하이항 난민 도착시 풍경,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기념관 내부 공간,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난민수용소 의무실 모습,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난민수용소 내 결혼식 기념물,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이들 유태인들이 상해행 배를 타기 위해서는 중국 비자가 필요했는데, 당시 오스트리아 비엔나 주재 중국영사관 총영사였던 허펑산(何凤山.1901-1997)은 수 천명의 유태인들에게 이를 허용하지 말라는 중국정부 방침에도 불구하고 중국 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2001년에 이스라엘 정부는 이러한 허펑산의 공로를 인정하여 ‘국제정의인사’ 칭호를 수여했고, 2007년에는 그에게 ‘명예공민’ 칭호를 부여했다.
유태인 청년단체 Betar 표식,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독일어 잡지 ‘유태청년’ 발간(1940년) 기념물,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상해경찰국이 발급한(1945년) 거주증,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당시 상하이 식민지배 중이던 일본 상해헌병대가 발급한(1944년) 무국적 피난민 통행허가증,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하지만 이들이 도착한 상하이 역시 안식처는 아니었다. 1937년 11월,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조계에 대한 식민 통치를 시작했고, 상하이에 도착한 유태인들 역시 일본군의 핍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태리의 세계 2차대전 참전으로 1940년 6월 8일, 마지막 페리선이 이태리에서 상하이로 출항한 후, 유태인 난민의 상해행은 중단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까지 상하이에 도착한 유태인 난민은 모두 2만명으로 이중 2천명이 미국유대인회 등 민간단체의 도움으로 미국 등 제3국으로 다시 이주를 떠날 수 있었다. 나머지 1만 8천여명의 유태인들은 상하이에 마련된 4곳의 난민 거주지에서 생활해야 했다. 초기 이들은 병원 2곳, 학교 1곳을 세워 유태인 커뮤니티를 유지하며, 중국인들보다 더 곤궁한 생활을 유지했다.
난민생활용품,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당시 난민 Jerry Moses 기록물,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7살때인 1941~1947년간 상해 유태인 난민수용소에서 거주. LA Times 매거진.
난민 생활상,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2차대전이 종식되자 상해와 중국 각지에 있던 유태인들은 다시 전 세계 각국으로 이민을 가기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1946년부터 1951년까지 중국에 있던 2만 2천명의 유태인들이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남아공, 팔레스타인(후에 이스라엘 건국)으로 향했다. 이러한 1930년대 상하이 유태인 생활상을 기록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 바로 이 기념관이다.
당시 난민 생활상을 서술한 베티 그레벤시코프(Betty Grebenschikoff. 1929-2023)와 그녀의 저서,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책 제목은 Once My Name Was Sara. 그녀는 11살 때인 1940년에 상하이 도착.
난민 수용소 모습,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유태인 야콥 로젠펠트 조각상과 사진,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야콥 로젠펠트(Jakob Rosenfeld. 1903-1952).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했으며, 빈 의과대학을 졸업함. 1939년 상하이에 입국하여, 공산당과 함께 군의관으로써 신사군, 팔로군, 동북인민해방군에서 보건 업무를 담당함. 외국 의사로는 유일하게 중국 정규군 고위계급을 받은 공산당 특별당원임.
현재 상하이 유태인난민기념관은 옛 유태인 모세 회당(시나고그·Synagogue) 터로, 1927년 상하이 창양로 62번지에 세워졌으며, 원래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한 외국인이 1907년에 건설한 사택이었다. 1930년대 당시 다른 곳에 세들어 지었던 모세회당을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돈을 모아 이곳에 조성하기 시작했고, 중부 유럽계 유태인들이 예배당을 완성했다. 이후 이곳을 중심으로 조성된 상하이 유대교공회는 당시 상하이 최대 유대인 커뮤니티로 당시 유대인 난민들에게 중요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또 다른 중요한 유태인 조직인 시온주의 청년단체 '베타'의 본부도 이곳에 있었다.
기념관 내부 메모리얼 광장,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명패에는 당시 유태인 난민 13,732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들의 후손들은 이곳을 방문하여 추억을 기린다.
모세 회당(유대교 회당 시나고그·Synagogue) 내부, 상해유태난민기념관. 2023 Ⓒ 김동하
오늘날 상하이 유대난민기념관으로 조성된 모세 회당은 중국 전체에서 가장 많은 유대 난민 역사와 실물 자료가 있는 곳으로 중국을 방문하는 전 세계 유대인들의 필수 방문지가 됐다. 2007년 3월, 상하이 훙커우(虹口)구 정부가 기록관에서 발견한 원본 건물 도면을 토대로 전면 보수해 지금의 상하이 유태인난민기념관이 건설됐다. 그 결과, 1928년에 만들어진 유태인 회당도 당시 건물 구조로 복원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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