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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여행기 작성
서울에 처음 온 눈이 폭설, 남쪽으로 떠나는 마음은 심난하다. 긴 시간을 이동해 도착한 보성, 갯내음이 스민 갈대밭의 겨울노래는 찬란하다. 분위기 근사한 겨울여행지, 보성 중도방죽
눈폭탄 맞은 서울에서
중도방죽 갈대밭까지 가는 여정
11월 말에 첫눈이 올 수도 있지, 그런데 이 정도의 폭설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날씨다. 하지만 여행 일정은 이미 잡혀있다. 이번 여행에는 휴양림에서 숙박이다. 휴양림 예약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사람은 안다. 가성비 갑에 가심비 갑인 곳이 휴양림이니까. 혹시 누군가 취소하지 않을까 틈만 나면 휴양림 예약페이지에 들어갔다. 갑자기 취소한 누군가 덕분에 드디어 예약할 수 있었다. 나름 어려움을 뚫고 예약한 숙소였기에 악천후에 마지막까지 고심을 하다 결국 출발을 결정했다. 연말이라 여행지기와 일정 조율이 어려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다.
세 명의 여행이다. 나이도 제각각, 여행 스타일도 다르다. 여행지 도착까지는 같이, 여행지에서는 따로 행동하였기에 저마다의 스타일로 여행을 즐겼다.
서울에 눈이 엄청 왔기에 엉금엉금 기다시피 차가 움직였는데 안양이 더 많이 왔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인 그는 어제 몇 시간을 아파트 언덕에서 눈썰매를 탔다고 했다. 출발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 학교에서 오늘 휴교라는 메시지가 왔다. 정말 눈이 많이 오긴 왔구나. 서울, 경기권은 이토록 설국이니 남쪽은 어떨까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눈이 사라져갔다. 본래 보성까지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가 6시간으로 늘어났다. 그래도 출발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서 많은 고민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빨리 도착한 거 아닌가.
남녘은 늦가을의 스산함이 겨울의 문턱을 넘보고 있다. 보성 중도방죽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이왕 밥 시간 늦은 김에 죽도방죽을 보고 난 후에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이것이 잘못된 선택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밥 이야기는 중도방죽의 가을 분위기를 마음껏 즐긴 후에 하겠다.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
조선인의 아픈역사, 중도방죽
중도방죽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 위치한다. 벌교역에서는 남쪽으로 약 약 700m 거리에 있다. 꼬막 요리로 유명한 벌교와 가깝다. 중도방죽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실존 인물인 일본인 중도(中島, 나카시마)가 바닷물이 밀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간척지 방죽으로,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고 한다.
본래의 목적이야 바닷물을 막는 것이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시기에 맞물리면 수탈의 흔적이다. 방죽을 쌓기 위해 올린 돌, 흙덩이 하나에 담겨있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중도방죽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어 그 고통을 실감할 수 있다.
“워따 말도 마씨오, 고것이 워디 사람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혀 사는 가난헌 개 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녕에 풀칠허자고 뫼들어....... 하여튼지 간에 저 방죽에 쌓인 돌뎅이 하나하나, 흙 한 삽, 한 삽이 다 가난한 조선사람덜 핏방울이고 한(恨) 덩어린디. 정작 배불린 것은 일본놈덜이었응께”
일본은 왜 방죽을 쌓았겠는가? 방죽을 쌓아 농지를 만들어 식량을 생산해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다. 벌교천과 갯벌이 만나 갈대가 자라기 시작했고 지금의 중도방죽은 너른 갈대밭과 갯벌생물들, 철새가 찾아와 가을 멋이 가득하지만, 그 이면에 조선인의 땀과 고통 또한 기억하려고 한다.
갈대밭 사잇길
철새 쉬어가고 마음 쉬는 곳
중도방죽은 총 3.8km로, 벌교천과 갯벌이 만나는 곳에서 시작해 남해고속도로 벌교대교 아래까지 이어진다. 왼쪽으로는 논이, 오른쪽으로는 갈대숲이 펼쳐진 갯벌로 인해 독특한 풍광이다.
천상의 갯벌이 숨 쉬는 중도방죽 표지판이 있는 곳은 꼬막 조형물로 인해 벌교이 드러난다. 나무데크를 새롭게 놓는 공사 중에 있다. 갈대밭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다리를 건너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벌교항 뒤쪽의 공터에 차를 세우고 갈대밭 쪽으로 걸어갔다. 꽤 긴 나무다리 앞에 몇 개의 운동기구가 보인다. 갈대숲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유연한 듯 쌀쌀하다. 이미 겨울로 넘어간 시기 탓일 수도 있다. 사실 서울은 겨울이었으나 이곳은 늦가을이다. 겨울 철새들이 찾아와 이곳에서 머물다 더 먼 곳으로 떠나는 철새 도래지이기도 하다.
차가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갈대를 보며 둘러보는 것만으로 이곳 보성까지 온 이유가 된다. 어른 키를 넘는 갈대밭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내가 가을의 한복판에 있음을 노래하는 듯하다. 벌교천을 가로지르는 목재 다리 위에서 새들의 나른한 오후를 보고, 수면에 흔들리는 윤슬에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가을 노래를 실컷 듣고 나니 이제야 출출함이 느껴진다.
보성, 밥은 꼭 밥때에
"보성보리밥집"
보성에 오면 밥때 되면 밥부터 챙겨 먹어야 한다. 2시만 넘어도 영업을 하는 곳이 별로 없다. 중도방죽에서 벌교대교 위쪽의 시내에서 꼬막요리를 먹었다면 사정이 달랐을 수도 있다. 여행지기가 둘 다 소식좌다. 다음 코스인 대한다원으로 향하는 길에 밥을 먹기로 하고 바지락칼국수를 찾아갔으나 밥때 아니란다. 몇 곳을 들어가봐도 고개를 절래절래, 어떤 집은 들어가려고 하니까 안에서 문을 잠그더라는. 이때 보성보리밥집이 눈에 보였고 전화를 했더니 쉬는 중이셨던 듯하다. 식당에 왔냐고 몇 번이나 묻는 주인 어르신, 아마 여기까지 밥 먹으러 왔는데 그냥 보내기가 안 좋았던 것 같다. 전화에다 대고 밥 먹을 곳이 없어서 헤매고 있다고 하니 내려갈 테니 오란다. 그렇게 보성에서 보리밥을 먹게 되었다. 사실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서 김치찌개는 안되냐고 조심스레 여쭈는데 안된단다. 쉬는데 나온 주인아주머니의 마음을 생각해 보리밥으로 통일했다. 속은 순박하고 정스러우나 겉으로 드러나는 친절은 기대하지 않는 게 낫다.
보리밥 가격은 10,000원, 된장찌개가 슴슴하니 맛나다. 한 그릇 가득 내주는 숭늉이 구수하다. 큰 그릇에 각종 나물과 보리밥을 넣고 쓱쓱 비벼서 먹었다. 고추장을 넣지 않았는데도 간이 적당하고 맵기도 좋다. 밥을 다 먹고 난 후에야 고추장 옆에 참기름 통을 발견했다. 비빔밥의 재료 맛을 낱낱이 맛보긴 하였지만 참기름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면 더 맛있었을 수도.
***보성보리밥집
전남 보성군 보성읍 중앙로 58-6
061-853-4549
영업시간 11:00~20:00 (일요일 휴무)
점심과 저녁 사이의 중간(2시 이후부터 5시 사이는 전화 후 방문하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