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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대륙답게 지역별로 기후와 문화, 역사가 다양하다. 그렇다보니 어느 한 도시만 여행하고 중국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륙을 관통하는 공통의 선(線)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석굴 사원이다.
석굴 사원은 인공 또는 자연적으로 바위산을 깍아 만든 사원이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서 시작됐다. 건조하고 더운 인도의 기후와 맞아떨어지며 초기 불교 시대 수많은 석굴이 만들어졌다. 엘로라, 아잔타 석굴이 대표적이다. 지금도 1,000여개 가량의 석굴이 인도 전역에 남아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2세기 후반, 후한(後漢)이다. 서역에서 온 승려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불경을 전했다. 쿠마라지바(구마라습) 등에 의해 경전이 번역되며 불교가 대중화됐고, 이후 많은 석굴사원이 조성됐다.
중국의 불교 전성기는 위진남북조시대다. 후한이 멸망한 221년부터 수(隋) 문제가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598년까지다. 중국 역사에서 춘추전국시대와 함께 대표적인 혼란기로 꼽힌다. 하지만 불교는 꽃을 피웠다. 황실 차원에서 불교를 숭상했고, 민중들은 불교에 귀의하며 고단한 일상을 버텨나갔다. 중국 전역에 수많은 사찰과 석굴사원이 건축됐다.
이 중 중국 4대 석굴이라 불리는 막고굴(莫高窟), 맥적산(麥積山), 운강석굴(雲崗石窟), 용문석굴(龍門石窟)을 소개한다.
감숙성 돈황(敦煌), 막고굴
호십육국(五胡十六國) 전진(前秦)시대인 365년경에 시작해 원(元)까지 천여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20여년 전 한중일이 공동 제작한 다큐멘터리 <新실크로드>에도 자세히 소개됐다.
돈황연구소 연구원은 막고굴을 이렇게 소개했다.
"막고굴은 돈황에 살았던 모든 이들이 희망을 내맡긴 장소였다. 그래서 막고굴은 감동적이다"
석굴사원을 단순히 건축학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석굴사원은 가난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던 평범한 이들의 희망의 공간이었다.
1900년대 초 돈황석굴을 지키던 관리인 왕원록은 청소를 하던 중 막혀있던 17호굴(장경동)에서 3만여점의 문서를 발견했다. 돈황유물의 정수인 돈황문서가 세상에 나오던 순간이었다. 돈황문서에는 평범한 이들의 삶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빚을 못 갚아 노예로 팔려가는 여섯살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비. 집안에 보탬이 되고자 출가를 결심하고 새벽에 길을 떠나는 소년. 죽음을 기다리며 좁은 굴에 들어가 출입문을 닫고 수행에 들어간 노승. 사람들은 막고굴에서 기도하며 슬픔을 쏟아내고 희망을 얻어갔다.
막고굴은 1.6km에 달하며 북굴과 남굴이 있다. 북굴은 승려들이 주로 수행했던 장소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남굴만 관람이 가능한데, 그마저도 일부만 개방되어 있다. 또한 가이드의 안내에 의해서만 관람할 수 있고, 내부 사진촬영은 금지다. 이는 막고굴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1900년대 유럽 열강의 고고학자, 도굴꾼 등은 막고굴 내부의 벽화를 뜯어가고, 문서를 실어 본국으로 가져갔다. '문화제국주의'였다. 당시 혼란기였던 중국 정부는 문화재 보호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피터 홉커크는 그들을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 불렀다.
비록 막고굴 내부 벽화들은 상당부분 뜯겨나갔지만, 이곳에서 희망을 속삭이고 슬픔을 이겨냈을 이들을 떠올리면 감동은 충분하다.
막고굴 주변 풍경
막고굴에서 가장 큰 96호굴. 내부에는 높이 35m가 넘는 대불이 있다
감숙성 천수(天水), 맥적산 석굴
맥적산 석굴이 있는 천수는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다. 팔괘를 비롯해 인간세상의 대부분을 창조한 삼황오제 중 한명인 복희(伏羲)의 고향이다. 매년 음력 1월 16일마다 천수시내에 있는 복희묘에는 제사가 거행된다.
<삼국지>시대, 제갈량은 천수에서 촉나라의 마지막 인재였던 강유 장군을 얻었다. 또한 1차 북벌 중 가정을 뺏긴 마속을 눈물로 베었던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장소기도 하다.
맥적산 석굴은 천수시내에서 50km가량 떨어져있다. 보릿단을 쌓아놓은 것처럼 생겼다 해서 보리 맥(麥)과 쌓을 적(積)'을 썼다. 194개의 석굴과 석상, 7200구의 불상이 있다. 석굴안에 새겨진 글에서 오호십육국시대 중 요진(384~417)에 축조됐다는 내용이 나와 설립연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
입장권을 끊고 경내 관람차를 탄 뒤 조금 걷다보면 원통형의 봉우리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맥적산이다. 봉우리를 둘레로 공중 잔도가 마치 소의 힘줄처럼 붙어있다. 수천년간 이어진 중국의 잔도 기술이 새삼 놀랍다.
맥적산 석굴은 당나라 22년(734년)에 대지진으로 중앙이 무너져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졌다. 오른쪽이 동쪽굴, 왼쪽이 서쪽굴이다. 동쪽에는 맥적산에서 가장 큰 규모인 13호굴 동애대불(삼존불)이 있다. 15.7m나 되는 높이로 아미타부처님,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조각한 것이다. 수나라 문제때다. 서쪽에는 98굴인 서애대불(西崖大佛)이 있다. 북위(386~534)시대 불상으로 가운데 불상은 높이 12.2m나 된다. 1978년 보수하던 중 가슴 부위에서 292개의 동전으로 만든 목걸이가 발견됐다. 한나라부터 송나라까지의 유물이다.
잔도는 생각보다 튼튼하고 견고했다. 하지만 역시 공중을 걷는 잔도는 두렵고 아찔할 수밖에 없다. 눈앞으로는 웅장한 산세가 펼쳐져 있지만 오르는 내내 긴장감을 놓칠 수 없었다. 위험천만한 이곳에 자신의 몸에 동앗줄을 감고 매달려 암벽을 깍았을 이를 모를 석공들의 노고가 떠오른다. 온전한 불심(佛心)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잔도에 오를 수록 역동적이고 화려한 불상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다른 석굴에 비해 훼손이 덜하고 보존 상태가 좋아, 당시 화려했던 불교문화를 엿볼 수 있다.
석굴을 둘러싸고 있는 공중잔도
산시성 대동(大同), 운강석굴
운강석굴은 북경에서 고속열차로 3시간 거리인 다퉁(대동)시에 있다.
대동시는 398년부터 494년까지 북위 시대 수도였다. 북위는 중국 역사상 가장 독실한 불교국가였고, 자연스레 다퉁은 불교의 중심지가 됐다. 운강석굴은 다퉁에서 서쪽으로 16km 떨어진 스리허(十里河)유역의 우저우산 남쪽 기슭에 있다. 다양한 크기의 252개의 석굴과 51,000여개가 넘는 석상이 있다.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승려 탄야오(담요)가 처음 조성했다. 그가 만든 '담요오굴'(16굴~20굴)은 선제 5인을 위해 만들었다. 통일된 디자인으로 중국 불교미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다른 석굴과 달리 고대 인도풍과 닮은 아치형 지붕이 특색있다. 또한 각 굴마다 문과 창문이 있어 마치 석굴이 집처럼 독립된 느낌을 준다. 석굴 중앙에는 거대한 불상이 자리하고, 외벽에는 천여개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비교적 보존이 잘되어있다.
거대한 석굴이 많은데 그 중 압권은 20굴인 노천대불이다. 북위를 건국한 도무제를 모델로 했다. 강인한 어깨와 위엄있는 얼굴로 조각했다. 권력자에 아첨한다기보다 왕조의 영원을 기원하기 위한 호국사상이 바탕이 됐다.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사싱이다.
운강석굴을 조성한 담요승려
운강석굴의 상징인 20굴 노천대불
허난성 낙양(洛阳), 용문석굴
백년의 중국 역사를 보려면 상해를, 천년의 역사를 보려면 북경을, 3천년의 역사를 보려면 시안으로 가라고 한다. 이보다 더 오래된 곳이 있다. 바로 낙양이다. 낙양에서는 5천년의 중국 역사를 볼 수 있다. 13개 왕조가 도읍으로 삼았고, 8개 왕조가 제2의 수도로 삼았다.
중국 최초의 사찰인 백마사(白馬寺)가 있고, 관우의 머리가 묻힌 관림(關林)이 있다.
낙양기차역을 용문석굴역으로도 부른다. 그만큼 용문석굴은 낙양을 대표하는 곳이다.
용문석굴은 북위의 황제 효문제가 수도를 낙양으로 옮긴 493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용문석굴이, 동쪽에는 장제스가 머물렀다는 향산사와 <장한가>를 쓴 시인 백거이 묘가 있다. 대부분 용문석굴만 보고 돌아가지만, 동쪽도 함께 둘러봐야 한다. 특히 거대한 용문석굴은 강 건너편에서 봐야 한눈에 볼 수 있다.
총 2천여개의 석굴 중 중심은 13m 높이의 봉선사동(奉先寺洞) 비로자나불이다. 당나라 측천무후가 조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장의 사진으로 담기에도 벅찰 정도로 거대한 불상의 모습에 당시 불교가 민중들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용문석굴은 끊임없이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여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석굴 하나 하나 감동이 넘쳐난다.
비로자나불
강건너편에서 바라본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