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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여행기 작성
| 거울의 방
원래 테라스가 있던 공간을 망사르의 설계에 따라 길이 73m, 너비 10.5m, 높이 12.3m의 거대한 거울실로 다시 꾸민 것이다. 1678년부터 1688년까지 무려 10년의 공사를 거쳐 완성됐으며, 천장에 있는 41개의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매우 아름답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식이 많이 거행된 곳으로 현재는 프랑스 대통령이 공식 귀빈을 위한 접견실로 사용한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혼했을 때에는 축하 가면무도회가 이 방에서 열리기도 했다.
내부 장식과 천장화는 평화의 방과 마찬가지로 르브룅이 맡았는데, 천장화에서는 태양의 신 아폴론이 새벽에 마차를 끌고 나가 해가 질 때까지 겪는 일들과 루이 14세의 치적을 묘사했다. 당시 루이 14세는 유럽 최고 품질의 거울을 생산하던 베네치아의 거울 제작 기술을 탐내 스파이를 보내고 기술자들을 스카우트하는 등 애를 썼는데, 기술 유출을 엄격하게 금하던 베네치아에서 자객을 보내 기술자들을 모조리 살해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결국 거울은 정식 수입과정을 거친 후에 들일 수 있었고 루이 14세는 그 한을 풀기라도 하듯 이 방 전체를 거울로 장식하게 했다. 총 17개의 대형 거울과 17개의 아치형 창문이 나있는데 이는 루이 14세의 초기 친정 기간(1661-1678년)인 17년을 상징한다. 17개의 거울은 총 578장의 거울을 이어 벽면 전체를 구성한다.
1871년에는 이 방에서 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한 독일의 빌헬름 1세가 대관식을 치르고 독일제국 탄생을 선포했다. 이 일은 프랑스에게 있어 매우 수치스러운 사건이었는데, 훗날인 1919년 프랑스는 이 치욕을 씻기라도 하듯 베르사유 조약의 협정실로 거울의 방을 택한다. 베르사유 조약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31개 연합국과 독일 사이에 체결된 평화 협정으로, 이 협약에 따라 독일은 프랑스에 알자스 로렌 지방을 반환하는 등 인구의 15%와 유럽 내 영토의 10%를 잃었다.
| 왕비의 침실
왕비가 머물던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방이자 가장 긴 시간을 보낸 방으로 종종 왕과 동침했던 침실이다. 왕비는 왕이 기상의식을 치렀던 것처럼 매일 아침 이곳에서 시녀들과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나는 궁중 의식을 치러야 했다. 이곳은 왕비가 공개 출산을 하는 방이기도 했다. 다만 ‘공개’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왕비는 천막 안에서 의사와 시녀, 왕자 · 공주들과 소수의 종교인들만이 자리한 가운데 출산을 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방에서 기다리는, 말하자면 지극히 상징적이고 형식적인 ‘공개’ 출산이었기 때문이다. 왕비는 별도로 마련된 출산용 침대에서 아기를 낳은 후 다시 본래 침대로 옮겨져 구경꾼들의 축하를 받았다. 루이 14세의 왕비인 마리 테레즈, 루이 15세의 왕비인 마리 레슈친스카, 그리고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방을 사용했으며 1682년부터 1786년까지 총 20명의 왕자 · 공주가 이 방에서 태어났다.
가구와 실내 장식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혁명군에 쫓겨 베르사유 궁전을 떠날 때 사용하던 것들을 복원한 것으로, 당시가 10월이었기 때문에 여름 가구와 천들로 꾸며져 있다. 사치스럽게도 베르사유에서는 여름에는 시원한 색상의 여름 천을, 겨울에는 따뜻한 느낌의 겨울 천을 사용해 방을 다시 꾸미곤 했다. 침대 위에는 프랑스의 국조인 수탉이 놓여 있고 파리시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선물한 보석 상자도 있다. 침대 옆의 벽면에는 비밀 문이 있어 왕의 방으로 바로 갈 수 있었다.
| 귀족의 살롱
식당 전실에 이어 제2 전실로 쓰였던 방이다. 루이 15세의 왕비인 마리 레슈친스카(Marie Leszczinska, 1703-1768)는 이곳에서 왕비를 둘러싼 캐노피 아래 앉아서 공식 알현을 받으며 귀부인들과 시간을 보내곤 했다. 루이 14세 스타일을 선호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천장을 뺀 나머지 부분을 완전히 새로 단장했는데, 애플그린색 벽에 넓은 금색띠를 두른 다마스크 테두리를 배치하고 세련된 새가구와 벽난로를 들었다. 코모드와 코너에 있는 수납장 등은 이때 가구 제작자 리즈네르가 제작한 것이며 거울 앞에 놓인 한 쌍의 금박 촛대 역시 이 시기에 제작됐다.
| 대관식의 방
나폴레옹의 영광을 위해 헌정된 방으로, ‘대관식의 방’이라는 이름은 다비드(David)가 그린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이라는 그림에서 따온 것이다.
천장화는 앙투안 프랑수아 칼레(Antoine-Francois Callet)의 작품이다. 각각의 문 위에 걸린 그림은 루이 18세의 의뢰로 용기, 천재성, 관용, 인내를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루이 18세는 루이 16세의 동생으로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추방된 후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방 가운데 서 있는 기둥은 1805년 오스테를리츠(Austerlitz)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는 조형물로 세브르 자기로 제작된 것인데, 파리 시내에 있는 저 유명한 개선문 역시 바로 이 오스테를리스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오스테를리츠 전투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에 대승한 전투로 나폴레옹의 3대 승전기록 중 하나이자 그가 크게 활약한 대표적인 싸움으로 알려져 있다.
| 전쟁의 갤러리
루이 필리프가 조성한 방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큰 방이다. 길이가 120m, 너비가 13m이며 1833년 설계를 시작해 1837년에 완성됐다. 남쪽 날개관 1층을 거의 차지하고 있고 프랑크 왕국을 세운 클로비스 1세(Clovis I, 446-511)에서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33점의 역사화를 통해 프랑스의 승전을 기리고 있다.
클로비스 1세는 프랑크족의 수장이었던 킬데리크 1세의 아들로 프랑크 왕국 최초의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클로비스 1세는 476년 서 로마제국 몰락 이후 현재의 프랑스 동북부지역과 독일 서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 정착한 다른 게르만 부족과 왕국들을 제압하는 한편 남쪽으로 영토를 광대하게 확장해 나가 481년 프랑크 왕국을 세운 인물이다.
루이 필리프는 클로비스 1세 이래 프랑스가 국내·외에서 승리한 전투들을 묘사함으로써 평화롭게 번영을 누리는 새 시대를 열고자 했다. 가장 큰 4개의 그림은 카를베르네의 아들이자 당대를 대표하는 전쟁 화가였던 오라스 베르네(Horace Vernet)의 작품이고, 나머지는 부쇼(Bouchot), 쿠데(Couder), 들라크루아(Delacroix), 페롱(Féron), 하임(Heim), 마제시(Mauzaisse), 셰페르(Scheffer) 형제 등이 그렸다.
한편 내부 건축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루브르 박물관의 그랑 갤러리(Grande Galerie du Louvre) 프로젝트를 연상케 하는데, 아방가르드식 기둥과 유리 천장, 대리석과 채색·도금된 벽돌 등으로 섬세하게 장식돼 있다. 판테온과 같이 국가적 영광을 기리기 위해 전투에서 사망한 장교들의 흉상,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왕자·육해군 원수의 이름이 적힌 청동 테이블이 있다. 이 방은 손길이 닿지 않아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거의 모든 장식은 루이 필리프가 의뢰한 것이다. 1982년 여덟번째 G7 정상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