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새 여행기 작성
새 여행기 작성

쿠바, 어쩌면 아메리카의 역사를 바꾼 어느 총독의 아이디어
저번 여행기에서
쿠바의 첫 무비자 여행객인 콜럼버스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콜럼버스가 쿠바를 방문했을 때,
같이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은 쿠바의 총독이 됩니다.
이 총독은
쿠바섬의 역사를 통째로 바꿔놓습니다.
쿠바의 식민지화
출처 : Wikipedia (Diego Velázquez de Cuéllar)
쿠바의 식민지화는 스페인 왕의 명령을 받은 벨라스케스에 의해서 1511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단어들의 기원인 타이노족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빠르게 쿠바를 지배했습니다.
I 평화로운 아바나의 바다 1515년 벨라스케스는 아바나 식민 도시를 세우고 쿠바 섬을 정복하여 총독이 되었다.
벨라스케스는 콜럼버스의 아들이자 서인도제도 총독이었던 디에고 콜럼버스의 지휘하에 쿠바 정복을 이끌었는데 쿠바의 바라코아에 처음 정착촌을 건설하고 내륙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으며 산티아고데쿠바, 아바나 등 총 7개의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I 아바나 최초의 미사, 에템플레테 신전 내부에는 이곳에 있는 케이폭나무 아래서 개최된 아바나 최초의 미사와 아바나 시의회 회의를 집행한 모습을 묘사한 커다란 캔버스화가 있다. 그리고 콜럼버스 흉상도 있다.
쿠바의 첫 번째 총독이었던 벨라스케스는 토착 원주민의 개종을 명분으로 그들의 노동력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말 그대로 종교 깡패입니다.
I 그 때를 간직하고 있는 에템플레테 신전 앞에는 1519년 당시의 케이폭나무 자손이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도대체 타이노족의 노동력이 왜 필요했을까요?
무엇보다 16세기 초반,
스페인 정복자들은 쿠바에서 금을 발견하고 이를 채굴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사실 신대륙을 발견하려는 첫 번째 목적도 금이었지요.
금 채굴을 위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현지 원주민인 타이노족이 강제로 노동 착취를 당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은 학대, 노동 착취를 당했습니다.
무엇보다 천연두같은 유럽발 질병으로 면역력이 부족한 타이노족은 인구가 급격히 감소해 거의 전멸 상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쿠바의 섬의 비극은 타이노족의 전멸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섬에 오게 된 또 다른 대륙의 사람들
I 파도가 치는 말레콘 이 험한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있다.
종교 깡패인 벨라스케스는 놀라운 발상을 합니다.
쿠바 원주민들의 약한 노동력을 스페인 왕실에 보고했을 뿐만 아니라 1513년 흑인 노예들의 수입 허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없던 이웃도 만들어서 죽을 때까지 착취하라고 이해한 벨라스케스의 보고와 스페인 왕실의 결정은 쿠바, 아니 아메리카 역사를 크게 바꿔놓게 됩니다.
I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바다 위에 흑인 노예들이 지은 모로성 방어할 목적으로 흑인 노예를 통해 1589년에 시작하여 1630년에 완공하였다.
아프리카에서 먼 바다를 건너 쿠바 섬에 도착한 흑인들은 금 채굴장으로 투입되었습니다.
그리고 금 채굴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로 노동 착취는 이어졌습니다.
카리브해에 아프리카인이 진입하게 된 이후로,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무려 1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 비극은 지금 쿠바의 인구 구성에 큰 영향을 준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역사에 깊이가 많이 부족했던 필자는 여행 중에 늘 궁금했습니다.
“왜 원주민이 아닌 흑인들이 이곳에 많이 살까?”
특히, 벨리즈와 쿠바를 여행할 때 그런 느낌을 크게 받았는데
이제 알게 됐습니다.
I 아바나의 거리 타이노족은 만날 수 없다.
2012년 쿠바 국립통계청(ONEI) 인구 조사에 따르면
백인 64.1%, 혼혈 26.6%, 흑인 9.3% 그리고 아시아인이 1%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필자가 여행한 아바나는 쿠바에서 백인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라고 합니다.
산티아고 데 쿠바가 있는 동부 지역은 사탕수수 농장이 집중됐던 곳이라 흑인과 혼혈 인구가 더 많다고 합니다.
지금의 인구 구성은 쿠바섬에 살던 타이노족과 아프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민들의 비극의 산물이네요.
I 쿠바 흑인 노예들이 지은 레알푸에르사 요새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요새로 1558년에 건설하기 시작해서 1577년에 완공되었다.
채굴장으로 투입됐던 노예들은 아바나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현장에 투입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모로성과 레알푸에르사 요새입니다.
둘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아바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요새라는 점 그리고 두 요새 모두 아프리카 노예들의 노동력으로 건설됐다는 것입니다.
거대한 돌을 캐고 쌓는 작업은 노예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이죠.
I 대포가 전시되어 있는 레알푸에르사 요새 현재는 쿠바의 해양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콜럼버스 이전 시대부터 18세기까지의 쿠바 해양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스페인 때문에 이 먼 바다를 건너오게 됐는데,
식민지를 지키는 요새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당시 얼마나 처참한 심정이었을까요?
I 고요한 카리브해 강제로 이곳에 온 사람들은 이 바다 너머의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이런 역사의 시작엔 벨라스케스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만의 원인은 아닙니다. 그의 통치 말기인 1520년대부터 소규모로 아프리카 노예가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대규모 노예 무역은 18세기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벨라스케스가 쿠바를 식민지화하면서 원주민 노동력 붕괴를 초래한 게 간접적으로 노예제 도입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I 말레콘에서 낚시를 즐기는 쿠바 사람들 모로성이 보이는 이곳은 노동 착취의 공간이 아닌 쿠바 사람들의 안식처가 됐다.
그러면 도대체 대규모로 노예가 들어오게 된 이유는 뭘까요?
처음에는 금 채굴이 목적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노예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높은 수요에 따라 엄청난 공급이 이뤄져
대규모 노예가 쿠바섬에 들어오게 됩니다.
도대체 쿠바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지금의 현대인들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거긴 합니다.
다음 편에 소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