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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독립, 독립
콜럼버스가 이 섬을 찾은 이후로
원래 살던 타이노족은 전멸했고
그 빈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프리카에서 먼 바다를 건너와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스페인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전멸한 타이노족과는 달리,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그들의 마음 속엔 자유를 갈망하는 분노가 쌓이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바뀌고 있는 쿠바섬
1807년 영국은 자국의 노예무역을 금지했고, 이후 다른 국가들도 노예무역을 중단하도록 외교적 압력을 가했습니다.
영국이 노예 무역을 금지한 이유는 단순히 도덕적인 측면만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필자도 이 부분에 대해 알아보는데 여러 가지 이해 관계가 얽히면서 나온 복합적인 처치여서 더 공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음 영국 여행을 가게 된다면, 이 부분에 대해 더 알아보겠습니다.
여튼 1817년, 영국과 스페인은 노예무역 철폐 조약을 맺었습니다.
1817년 조약을 통해 스페인은 노예무역을 즉시 중단하고, 1820년 5월 30일부터는 모든 스페인 영토에서 노예무역을 전면 금지하기로 합의했습니다.
I 아바나 대학교 1728년에 설립된 쿠바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로 학생들은 주로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스페인 혈통이나 스페인 출신이었다.
스페인이 그냥 “Hola~”하진 않았겠죠.
이 조약의 대가로 스페인은 40만 파운드의 보상금을 영국으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 이 금액은 당시 다른 국제 조약이나 영토 거래에서 지불 된 금액과 비교했을 때도 상당히 큰 액수였다고 하네요.
I 카리브해 노예무역 종식은 그냥 문서였다.
스페인과 영국이 스페인 식민지에서 노예무역의 종식을 합의한 1820년 이후에도 쿠바는 6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했습니다.
농장주들은 막대한 이윤을 만들어주는 이 설탕 산업의 큰 핵심인 노예제 폐지에 매우 반대했다고 합니다.
1850년까지 설탕 산업은 쿠바 전체 수출의 80%를 차지했으며 1860년 쿠바는 세계 설탕의 거의 삼 분의 일을 생산했습니다.
I 산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광장 영국 스페인 노역무역 철폐 조약을 이행하기 위한 혼성법정의 활동이 있던 곳
노예무역 철폐 조약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물론, 조약 이행을 감시하기 영국과 스페인은 아바나에 혼성 법정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법정에서는 불법 노예선을 나포하고 노예들을 해방하는 역할을 했다고 합디다만, 지역 당국의 비협조와 뇌물 수수 등으로 효과가 제한적이었다고 하네요.
I 말레콘 노을지는 카리브해의 말레콘
놀랍게도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진행된 이 비극적인 수입에 드디어 희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1865년 미국 남북 전쟁의 종결과 함께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이는 쿠바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당시 쿠바 경제는 설탕 산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설탕 생산은 주로 흑인 노예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미국 노예제도 폐지로 인해 쿠바는 저렴한 노동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설탕 산업의 생산성이 저하되게 됩니다. 또한, 미국 노예제도 폐지는 쿠바 독립 운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I 아바나 혁명 발물관 쿠바인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 몸부림쳤던 역사의 흔적들이 38개의 전시관에 나뉘어 보존되고 있다.
미국 남부 주들의 노예 소유자들은 노예제도가 폐지된 후 쿠바로 도망쳐 왔습니다. 그들은 쿠바에서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싶어했고, 쿠바의 독립을 반대했습니다. 반면에 쿠바 독립 운동가들은 미국 노예제도 폐지를 자신들의 독립 운동에 유리한 기회로 삼았고, 그들은 미국을 동맹국으로 삼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얻고자 했습니다.
노예제 폐지와 독립 운동
17∼18세기에는 흑인들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에스파냐의 가혹한 탄압으로 결실은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미국독립혁명의 영향으로 쿠바에도 스페인에 대한 독립의 불씨를 키우게 되는데 이 때, 호세 마르티라는 쿠바의 국민 영웅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호세 마르티
[출처: Wikipedia]
쿠바를 여행할 때, 호세 마르티라는 이름을 접하게 되니,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호세 마르티는 19세기 쿠바 독립 운동의 지도자이자 시인, 작가, 언론인으로, 쿠바 국민들에게 영웅입니다.
그는 쿠바 독립 운동의 지도자로서 스페인으로부터 쿠바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그의 정치적, 문학적 업적은 쿠바 문화와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I 아바나 혁명 발물관 앞 호세 마르티 동상 혁명 박물관을 대표하는 인물인 호세 마르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쿠바 아바나에서 태어난 호세 마르티는 어린 시절부터 스페인 식민 정부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었다고 합니다.
스페인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를 주도하다가 유배되었는데, 유배 생활 동안 그는 미국, 멕시코, 중앙 아메리카 등을 여행하며 쿠바 독립 운동을 위한 지지와 자금을 모금했습니다.
또한, 여러 나라에서 교사, 저널리스트, 번역가 등으로 활동하며 쿠바 독립 운동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호세 마르티는 뛰어난 시인이자 작가로서 쿠바 문학에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합니다.
뭐, 이미 9살 때 신문에 글을 게재했다고 하니 말 다 했지요. 필자는 9살에 받아쓰기조차 못해서 많이 맞았던 기억만 납니다. 호세 마르티 대단하네요.
그의 작품들은 쿠바의 아름다움과 문화를 찬미하며, 쿠바 국민에게 자긍심과 독립 의지를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특히 그의 시 ‘사랑하는 나의 조국’은 쿠바의 비공식 국가로 불릴 정도로 쿠바 국민에게 사랑받는 작품이라고 하네요.
1895년 호세 마르티는 쿠바로 귀환하여 독립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쿠바 혁명당을 창당하고 군대를 조직하여 스페인군과 맞서 싸웠지만, 1895년 5월 19일 전투 중 사망했습니다. 호세 마르티는 쿠바 독립 전쟁 중 전사했지만, 그의 죽음은 쿠바 독립 운동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I 호세 마르티 동상
스페인 정부는 1897년 쿠바에 자치권을 제안했으나, 대부분의 쿠바인들은 반군에 동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스페인군은 폭력적으로 반란군을 진압했는데, 이 과정에서 유명한 정책을 펼칩니다.
레콘센트라도스 정책인데요.
이 정책은 농촌 주민들을 요새화된 마을로 강제로 몰아넣는 정책이었습니다. 스페인군은 반군을 지원한다는 의심으로 농민들을 마을에 가두고, 식량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열악한 환경과 질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쿠바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사망했다는 추정도 있습니다.
이런 탄압 속의 쿠바 독립 전쟁은 미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국 언론은 스페인군의 잔혹 행위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쿠바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898년 2월 쿠바 역사를 바꿀 큰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I 아바나 항구 이곳에서 미국 군함 메인호가 폭파되어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이 시작됐다.
쿠바의 아바나항에 정박중인 미국 군함 메인호가 폭파하여 260명의 승무원이 사망합니다.
스페인은 이 폭파사건을 내부폭발이라고 주장했으나 미국 측은 외부 요인으로 판단했는데 당시 미국의 신문은 이를 에스파냐에 의한 침략적 파괴 활동이라고 보도하며 ‘메인호를 잊지 말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반에스파냐운동을 고취하여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을 촉발시켰다고 합니다.
I 말레콘 스페인, 아프리카 노예 이후, 또 다른 대륙의 사람들이 건너 왔다.
1898년 4월, 미국은 스페인에게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로써 미국 스페인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쟁은 미국이 초기부터 우세를 보였습니다. 미국은 쿠바에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여 병력을 신속하게 파견할 수 있었고, 스페인은 식민지 상실과 내정 혼란으로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1898년 5월에는 마닐라에서, 6~7월에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에서 스페인에 승리했습니다. 이후 미국은 각지에서 스페인을 제압하고, 스페인은 미국에게 철수를 요구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I 공연 중인 아바나의 거리 스페인의 패배는 그들에겐 꿈같은 일이었을 것 같다.
1898년 8월, 미국과 스페인은 휴전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은 쿠바에서 철수하고, 푸에르토리코와 괌을 미국에 양도했습니다.
미국은 마닐라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고, 이후 파리 조약을 통해 스페인은 쿠바의 독립을 승인하고,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을 미국에 넘겼습니다.
I 아바나 대성당 콜럼버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곳이다.
쿠바인들은 스페인 식민 통치의 종식을 환영했습니다. 쿠바는 1868년부터 독립을 위해 투쟁해왔으며, 마침내 400년이 넘는 스페인 식민 지배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I 말레콘 스페인이 떠난 쿠바는 미국과 동행하게 된다.
기쁨도 잠시,
미국은 파리 평화 조약 등 여러 과정에서 쿠바 독립군과 지도자들을 배제했습니다. 쿠바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발언권이 제한되었습니다.
스페인이 떠난 후, 쿠바는 1898년부터 미국의 군사 점령 하에 놓였습니다.
쿠바 사람들은 스페인에서 미국으로만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의구심은 현실이 되어 갔고 결국, 쿠바 내의 또 다른 큰 바람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다음 편에서는
우리에게 그나마 익숙한 미국과 쿠바 간의 있었던 일들과 인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