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탄스럽고 가슴아픈 한 시대의 역사다.
때론 외면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잊어서는 안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과거의 상처는 제때 치료하고 새살이 돋아나야 한다. 어둡고 뒤틀린 과거를 바로잡고 보듬어줘야 하는것이 우리들의 역할이다.
서울 시청 일대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남아있다. 바쁜 도시의 일상속에서 때론 스쳐 지나가기도 했고, 잊혀지기도 했던 장소다. 하지만 그곳은 치열하고 서글펐던 역사의 그림자와 같다. 세계 강국의 패권과 틈바구니 속에서 위태롭게 버텨갔던 조선시대 말 그리고 대한제국의 역사가 오롯이 남겨져있다.
♦ 대한 제국의 길
덕수궁(중명전)→ 러시아공사관(아관파천의길)→ 구세군중앙회관→ 서울시립미술관→ 배재학당(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정동제일교회→ 정동국립극장→ 이화학당→ 환구단
덕수궁은 고종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궁궐이다. 고종이 승하한 곳(함녕전)을 비롯해 커피를 즐겨 마셨던 정관헌이 있다. 특히 서양식 건축양식으로 석조전을 지음으로써 고종은 대한제국이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립된 나라임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덕수궁 뒷편은 별도의 문으로 들어가는 중명전이 있다.
중명전은 우리에게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긴 을사늑약 체결장소다. 을사늑약은 고종은 불참한 채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 5명의 대신들이 했다.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은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가 주 내용이다.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고종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린다. 시대를 헤쳐나가지 못한 나약한 군주였지만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헤이크 밀사를 파견하는 강건한 모습도 보여줬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결국 고종을 끌어내고 순종을 왕위에 앉혔다. 중명전에는 당시 을사늑약 채결 장면이 재현되어 있으며 헤이그 특사 파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덕수궁 석조전
을사늑약 체결 장소인 중명전
다음 목적지는 러시아 공사관이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1896년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바로 아관파천이다. 파천은 난리를 피해 임금이 도성을 떠나는 일을 뜻한다. 러시아 공사관 우측에는 좁은 돌담길이 있는데 '고종의 길'로 불린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궁녀들이 타는 가마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을 빠져나와 이 길을 이용해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다.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도중에 일본에 발각되면 목숨이 위험했을 테니, 긴박한 탈출의 길이었다. 역사유적지에 오는 이유는 그 시대를 상상할 수 있는 현장감을 얻는데 있다. 그는 이 길을 가면서 얼마나 두렵고 긴장했을까.
아관파천의 길(고종의 길)
아관파천의 길(고종의 길) 앞에는 서양식 건축양식으로 지은 구세군 회관이 나온다. 1928년 준공된 구세군 회관은 그동안 빈민구제에 노력해왔다. 고종의 길을 중심으로 현재 문화재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몇년 뒤에는 한층 정돈된 문화유적지로 재탄생될 것이다.
구세군 회관
구세군회관에서 나와 왼쪽으로 코너를 돌면 서울시립미술관이 나온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경성재판소로 사용했다. 해방 이후에는 대법원 청사로 운영되다가 1995년 서초동 청사로 대법원이 이전하면서 지금까지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근대고딕건축양식으로 지은 미술관의 내부는 화이트톤으로 정갈한 느낌을 주며, 천장이 높아 탁 트인 개방감을 준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건너편에는 멋진 갈색 건물의 배재학당이 있다.
배재학당은 미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1886년 지어진 한국 최초의 서양식 학교다. 원래는 아펜젤로 홀이었으며 1984년까지 배재고등학교 건물로 사용됐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의 설립목적을 이렇게 설명했다.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학교에서 일할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양성하는 것이다'
배재학당 뒷편에는 박물관 입구가 있다. 아펜젤러를 비롯해 당시 대한제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배재학당 옆에는 정동제일교회가 있다. 정동제일교회 또한 아펜젤러가 1885년 설립했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다. 유관순 열사 또한 이 교회를 다녔다. 일제는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을 트집잡아 한때 교회를 강제 폐쇄하기도 했다.
정동제일교회 맞은편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정동극장이 있다. 지금도 다양한 문화공연을 상영하는 정동극장은 원각사를 모태로 한다. 원각사는 1908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극과 판소리 공연장이었다. 당시 시대는 암울했지만 민중들은 시대를 풍자하는 사극과 판소리로 슬픔을 극복하고자 했다. 희극은 비극과 이어져 있었다.
정동극장 맞은편에는 이화학당이 있다. 이화학당은 1886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 교육기관이다. '한국여성들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 양성하자'는 신조로 스크랜튼 선교사에 의해 설립됐다. 조선은 여자가 교육받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시대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여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차츰 학생들이 늘어나며 여성교육의 산실이 됐다. 유관순 열사 또한 이화학당 출신이다. 비록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감옥에서 죽게 되었지만 향후 이화학당은 그녀에게 명예졸업장을 선사했다.
이화학당 박물관에는 유관순 열사를 포함하여 많은 이화학당 출신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제는 대한제국을 선포한 역사적인 장소인 환구단으로 향했다.
환구단은 덕수궁앞 차도를 건너 웨스턴조선호텔로 가야 한다. 1897년 고종은 환구단에서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꾸고 황제를 칭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대한제국이 명확히 독립국임을 전 세계에서 선포한 것이다.
<도덕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화 속에 복이 있고, 복 속에 화가 있다"
당시 우리의 역사는 환난 속에 있었지만, 민중들은 환난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대한제국의 길은 희망을 따라가는 길이었다. 진흙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새로운 생명력은 강했고 위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