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JU ISLAND, SUWOLBONG GEO TRAIL
제주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대표적인 길로 올레길과 환상 자전거길이 있고, 산과 숲에는 한라산 둘레길, 사려니 숲길과 비자림 같은 길이 있다. 하지만, 이 어느 곳도 내겐 인생길은 아니다.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내게 인생길이라 말하는 장소는 서쪽 끝 낮은 오름 아래 있는 길로 해가 지는 일몰 시간 때면 주황빛 석양이 바다를 잔 안에 담긴 와인으로 만든다. 서귀포의 서쪽 바다를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 인생길. 내겐 엉알길과 수월봉이 바로 그 인생길이다.
인생길
엉알길
제주의 여름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아침과 밤에는 선선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지만, 낮에는 여전히 덥다. 하지만, 점차 아침과 밤의 시원함이 낮까지 침범하고 있다. 그 말인즉슨 걷는 계절, 가을이 다가오고 있단 뜻이다. 가을 하면 나는 올레길을 주로 걷는데, 올레길을 걷기 전에 미리 예행연습을 할 길이 필요하다. 어떤 길을 걸으면 좋을까. 사실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인생길인 엉알길이 있었으니까.
제주에 처음 왔을 때 엉알길은 내게 센세이셔널한 기분을 선사했다. 바다와 맞닿은 멋진 길. 그 아래로 떨어지는 주황빛 석양. 뭐 하나 빼놓을 거 없이 완벽한 모습에 나는 이곳이 인생길임을 확신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풍경. 이 모습은 내게 제주에서 가장 많이 찾게 될 길로 남았다.
엉알길 끝에 주차를 하고 걸었다. 천천히 걸으며 멀리 보이는 수월봉 봉우리를 향했다. 가을이 왔다는 걸 인증이라도 하듯 시원하게 치는 파도와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고스란히 느꼈다. 걷기 좋은 가을이 왔다는 사실에 새삼 다시 한번 좋아진 기분. 2km 남짓 이어진 길을 한층 가볍게 걸었다. 엉알길 위에는 똑똑 떨어지는 녹고물이 있었고, 일제강점기라는 슬픈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진지 동굴이 눈앞에 담겼다. 눈에 담기는 다양한 것들을 바라보며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또 천천히 수월봉으로 다가섰다.
엉알길 끝자락
수월봉
2km 남짓의 엉알길을 걷고 수월봉에 다다랐다. 수월봉 근처에는 전기로 움직이는 오토바이(?) 혹은 자전거(?)가 쌩쌩 달리고 있었고, 대부분 자동차로 수월봉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나처럼 걸음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몇 없었는데, 그럼 어떠한가. 77m의 낮은 높이를 지닌 수월봉은 오르기 수월했다. 가끔은 수월봉이 오르기 수월해서 수월봉이 아닌가 싶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수월봉 꼭대기에 5분 만에 도착한 나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음을 느꼈다. 7시가 넘는 시간에 해가 졌던 여름을 지나 6시가 조금 넘는 시간에도 해가 넘어가는 모습에 나는 벌써 가을이 왔다는 걸 깨달았다. 가을이 오고 있는 제주. 해가 지는 순간 후덥지근한 기온은 어느새 선선하게 내려갔고, 태양은 주황빛으로 제주 서쪽을 물들였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인생길인 엉알길부터 수월봉까지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사랑스러운 바다의 풍경. 시원하고 상큼한 제주의 바다가 따뜻하고 포근한 제주 바다로 변모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라 이 시간이 곧 사라지겠지만, 조금씩 흐르는 이 시간을 나는 너무나도 사랑했다. 인생의 황혼기와 닮아있는 모습. 바다 위로 수월봉의 너른 풀잎이 흔들리는 모습은 내 마음을 흔들었고,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왔다. 기분 좋은 하루를 마무리하게 만들어 준 엉알길. 이곳은 내게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하루를 끝마치게 했다.
누구에게나 있는 인생길. 내게 인생길은 여전히 수월봉이고 엉알길이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엉알길을 찾는다면 그대에게도 이곳이 인생길이 될 거라 확신한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경. 제주를 고스란히 담은 길이 바로 이곳이니까. 하루를 마무리하기 좋은 곳, 하루를 임팩트 있게 보내기 좋은 곳 엉알길. 이곳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건 어떨까. 분명 완벽한 하루가 될 테니.
오늘의 여행지
수월봉은 해발 77m 높이의 제주 서부지역 조망봉으로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특히, 깎아 만든 듯한 수월봉 해안절벽은 동쪽으로 2km까지 이어져 있다. 이 해안절벽은 ‘엉알’이라 불리며, 벼랑 곳곳에는 샘물이 솟아올라 ‘녹고물’이라는 약수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수월봉 아래쪽에는 해안선을 따라 지질 트레일이 있다. 해안 절벽을 따라 화산 퇴적물이 쌓여 있는 모습의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수월봉 정상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육각정인 수월정이 있으며, 수월정 옆으로는 고산기상대가 우뚝 서 있다. 우리나라 남서해안 최서단에 있는 기상대로서 거의 모든 기상 관측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곳 5층에는 일반인에게 오픈되는 전망대가 있다. 수월정에 앉아서 차귀도로 떨어지는 낙조의 모습은 제주도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일몰 명소 중 하나이다.
엉알해안, 엉알길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수월봉 밑에서부터 해안선을 따라 2km가량 길게 이어지는 해안 길이다. 수월봉은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서쪽 가장 끝에 위치한 고산리 해안에 있는 해발 77m의 비교적 낮은 화산인데, 이 아래로부터 이어지는 길이 엉알해안이다. 이 해안 지대는 원래 이 지역 일대 어민들의 어장이 들어서 있었으나 현재는 주로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해안의 비경을 감상하며 여유롭게 산책을 즐길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 명소이다. 이 해안 지대를 따라 길게 이어지며 형성된 해식애를 온통 뒤덮으며 지천으로 피는 구절초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