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통합검색

메인 주요 글

주요 아티클

프로테스탄트교회

프로테스탄트교회

16세기 종교개혁을 계기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하여 성립된 다양한 그리스도교의 분파를 총칭하는 말이다. 로마가톨릭교회 및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3대 교파를 이룬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프로테스트에서 기원했는데, 이 말은 1529년 2월 21일에 열린 독일 슈파이어국회에서 루터계 제후(諸侯)와 도시들이 황제 카를 5세 등 로마가톨릭 세력의 억압에 항거한 데서 유래하였다. 역사 루터가 독일에서 일으킨 종교개혁은 1526년 이후 독일의 여러 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30년 독일 루터교회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작성된 이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3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종교개혁은 스위스에서도 일어났다.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 슈트라스부르크에서는 부처, 제네바에서는 칼뱅 등이 주로 상공업자와 손잡고 프로테스탄트적 종교개혁에 앞장섰다. 이 같은 일련의 교회개혁 운동 과정에서 프랑스에서는 위그노전쟁이, 독일에서는 30년전쟁 등의 종교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유럽의 종교적 통일성은 무너져, 독일에서는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 유럽에서는 드디어 각 분파가 형성되었는데, 스위스계의 프로테스탄트를 개혁교회(改革敎會) 또는 장로교회(長老敎會)라고 부른다. 이 개혁교회는 프랑스·영국·스코틀랜드 ·네덜란드 ·헝가리 ·폴란드 등으로 확산되었다.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은 유럽 대륙과는 달리 영국성공회(英國聖公會)를 성립시

토르티이타스 데 카마로네스

토르티이타스 데 카마로네스

병아리콩 가루, 양파, 고추 등을 섞어서 만든 묽은 반죽에 작은 크기의 새우를 넣어 빈대떡처럼 부쳐낸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카디스주의 전통요리이다. 병아리콩 가루에 야채 등을 섞어 만든 반죽에 새우를 넣어 빈대떡처럼 부쳐낸 음식이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카디스주의 전통 요리로, 16세기 경카디스주 산 페르난도(San Fernando)에 위치한 라스 카예후엘라스(Las Callejuelas)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스페인어로 토르티이타(tortillita)는 멕시코 전통 요리인 ‘토르티야(tortilla)’에 지소사(diminutivo)인 ‘ita’를 붙인 형태이다. 또한 ‘카마론(camarón)’은 새우를 뜻하며, 정확히는 새우 중에서도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남부에서 나는 징거미새우상과(Palaemonidae)의 특정한 새우종(Palaemon longirostris)이다. 요리는 전통적으로 작은 크기의 새우인 카마론과 병아리콩을 갈아서 만든 가루를 활용하는데, 두 가지 모두 안달루시아 지방 이외의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재료이므로 작은 새우와 일반 밀가루를 활용하여도 좋다. 토르티이타스 데 카마로네스는 주로 말린 토마토나 샐러드를 사이드 디시로 곁들여 먹는 것이 보통이나, 카디스주 서부의 산 페르난도(San Fernando)나 북서부 끝의 산루카르데바라메다(Sanlúcar de Barrameda)와 같은 연안 지역의 레스토랑이나 바에서는 타파스로 즐겨 먹는다. 조리법

부르고스 대성당

부르고스 대성당

스페인의 부르고스주에 있는 성당으로, 프랑스의 고딕 양식이 스페인에 융합된 훌륭한 사례를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1984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스페인(에스파냐)의 카스티야이레온(Castilla y Leon) 자치지방에 속한 부르고스주에 있는 고딕식 성당이다. 이 성당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기 위하여 건축된 것으로, 1221년 카스티야왕국의 페르난도 3세(Ferdinand III) 통치 기간에 마우리시오(Mauricio) 주교가 주도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 1293년 가장 중요한 첫 단계 공사가 완성되었고, 이후 오랫동안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5세기 중반에 재개된 뒤로 100년 이상 지속되어 1567년에 완공되었다. 뛰어난 건축 구조와 성화(聖畵), 성가대석, 제단 장식벽, 스테인드글라스 등의 예술 작품과 독특한 소장품 등 고딕 예술의 역사가 집약된 건축물로서 이후의 건축 및 조형 예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지정된 면적은 1.03㏊이며, 주변의 완충지역(Buffer zone) 면적은 78㏊이다. 지정된 면적에 포함되는 대성당은 본당 건물과 회랑 및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 평면도는 라틴 십자가 모양에 삼랑식 신랑(三廊式身廊)과 단랑식 수랑(單廊式袖廊), 주보랑(周步廊) 그리고 방사상 제실(放射狀祭室)이 있는 내진(內陣)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랑과 수랑이 교차하는 네 구석에는 거대한 원주(圓柱)가 서 있어 팔각형의 대탑(大塔)을 지탱하고 있다. 서쪽

슬라이드 바로가기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가 개경 정부와 몽골에 대항하여 일으킨 싸움(1270∼1273). 삼별초의 항쟁은 13세기 고려가 몽골에 대항하여 최후까지 항쟁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원래 삼별초는 고려 무인정권하 몽골군의 침입 직전인 고종 17년(1230) 경 집정자 최우(崔瑀)에 의하여 야별초라는 이름으로 조직된 고려의 군사조직이다. ‘별초’라는 말처럼 이들은 정예군으로 선발된 조직이었으며, 무인정권이라는 정치적 조건하에서 만들어진 조직이었던 만큼 친정권적 성격을 가졌다. 몽골군의 대대적 침략이 시작되자 삼별초는 자연히 고려의 가장 강력한 군사집단으로 부각되었으며,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그 규모 역시 확장되었다. 야별초가 ‘삼별초’라는 조직으로 바뀌는 것 또한 이러한 조직 확대의 결과였다. 원종 11년(1270) 강화도의 삼별초는 몽골에 복속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원종의 고려정부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였다. 이들은 몽골에 복속한 개경정부를 전면 부정하고, 새로 조직한 그들의 정부야말로 고려의 정통정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장군 배중손, 야별초 지유 노영희를 중심으로 하여 강화도에서 봉기한 삼별초는 6월 강화도로부터 진도로 이동하여, 용장성을 구심점으로 개경정부와의 대결을 기도하였다. 이들은 구 후백제 지역과 남부 해안지역의 연안 해양세력권 구축을 통하여 개경정부 및 몽골과 대결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몽골의 압력에 대응하는 방편으로 일본과의 공동전선 구축을 시도 하였다. 진도의 삼별초군이 벌인 활동양상

포토커뮤니티

지구촌 여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