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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초 데 우에보

핀초 데 우에보

달걀을 주재료로 하여 그밖에 올리브나 안초비, 새우 등을 꼬치로 꿰어낸 스페인의 핀초스이다. 달걀을 주재료로 하여 만든 스페인의 핀초스이다. 이때 스페인어로 ‘우에보(Huevo)’는 ‘달걀’을, ‘핀초(Pincho)’는 핀초스라고도 불리는 바스크 지방의 전채요리를 뜻하는데, 음식을 꼬챙이에 끼워낸 형태를 띠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핀초 데 우에보(Pincho de huevo)’라 하면 달걀로 만든 핀초스를 의미한다. 주재료인 달걀은 주로 삶아서 활용하는 것이 보통이나 삶아서 튀기거나 프라이한 것을 활용하기도 한다. 달걀 이외에도 올리브, 파프리카, 안초비, 새우, 베이컨, 감자 등의 다양한 재료를 추가적으로 첨가하여 꼬챙이로 꿰어내는 경우가 많으며, 바게트와 같은 빵을 지지대로 세우고 그 위에 달걀과 다른 재료들을 쌓아 꼬챙이로 고정시키기도 하는 등 다양한 재료와 방법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 맛 또한 다양하다. 조리법 달걀은 삶아서 껍질을 까고 반으로 갈라 준비한다. 마요네즈를 달걀노른자 위에 올리고 그 위에 꼬챙이를 끼워 넣는다. 그 위에 삶은 새우와 올리브, 안초비와 같은 추가적인 재료들을 차례로 끼워 넣는다. 완성된 핀초 데 우에보는 접시에 담아 실온에 대접한다. 요리는 간단한 청량음료나 주류를 곁들여도 좋다. 영양정보 달걀에는 단백질, 비타민, 미네랄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 성장기 어린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체력 보충, 근육 형성, 탈모

라벤나의 초기 그리스도교 기념물

라벤나의 초기 그리스도교 기념물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 지방 라벤나주에 있는 종교 유적. 고대 로마문화와 비잔틴문화가 융합된 화려한 모자이크양식의 종교건축물들이 보존되어 있어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라벤나는 아드리아해와 접하고 포강(Po R.) 하구에 자리잡고 있어 교역의 중심지로 번성해왔다. 5세기 초 서로마황제 호노리우스가 수도로 정하였고 493년에는 동고트왕 테오도리크(Theodoric the Great)에게 점령당하여 526년까지 통치를 받았으며, 540년 무렵에는 비잔티움제국의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이후 라벤나는 동서교역의 중심지로서 경제적인 번영을 누렸으며 고대 로마문화와 비잔틴문화가 융합된  모자이크양식의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이후 751년에는 롬바르드족[Lombard, 랑고바르드족(Langobard)]의 침입을 받아 도시가 파괴되었고 756년에는 로마 교황령이 되었다. 15세기 중반에는 베네치아의 통치를 받았으며 16세기 초에는 다시 교황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라벤나의 성당 건축은 외관은 간소하지만 실내에는 다양한 모자이크를 이용하여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이 가운데 8개의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물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라벤나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네온세례당(Baptistry of Neon, 430년 무렵), 동시대의 기념물 중 모자이크가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갈라플라키디아 영묘(Mausoleum of Galla Placidia, 430년 무렵), 500년 무렵 테오도리크왕이 세운 아리안세례당(Arian Bap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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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주시경

개화기의 국어학자로, 우리말과 한글의 전문적 이론 연구와 후진 양성으로 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에 개척자 역할을 하였다. 황해도 봉산 출생으로 아버지는 주면석(周冕錫)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본관은 상주이다. 둘째 아들로 태어나 둘째 작은아버지 주면진(周冕鎭) 앞으로 양자(養子) 입양되었다. 어려서 처음에는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고, 양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온(1887. 6) 후에도 한문학을 배웠다. 그러나 서울에서 신학문에 흥미를 느끼고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1894. 9). 도중에 인천의 관립이운학교(官立利運學校)에 들어가 속성과를 졸업하였으나 정치적 혼란으로 해운계로 나가지 못하고, 다시 배재학당 보통과에 들어갔다(1896. 4). 때마침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있던 터에, 독립신문사 회계사 겸 교보원(校補員 교정보는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순한글 신문을 제작하여야 했기 때문에 한글의 이론과 표기법 통일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동료 직원들과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여 한글 표기법 연구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 일과 연구를 병행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서재필이 주도하는 배재학당협성회·독립협회에 참여하였다가 서재필이 추방당하자 독립신문사를 나오게 되었다. 대신 과거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제국신문》 기재(記載, 일종의 기자)를 하게 되었고, 동시에 선교사인 스크랜턴(W. B. Scranton)의 한국어 교사를 병행하였다. 한편으로는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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