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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마크아

땀마크아

구워 으깬 가지에 마늘, 고추 등의 각종 향신료와 채소 등을 첨가하여 버무린 타이 북부 지역의 특선 요리이다. 구워 으깬 가지에 각종 향신료와 채소 등을 첨가하여 버무린 무침 요리이다. 타이 북부지역의 특선 요리이며, 이때 타이어로 ‘땀(ตำ, tam)’은 ‘찧다’를 의미하고, ‘마크아(มะเขือ, makhua)’는 가지를 뜻한다. 요리의 주재료인 가지는 타이산의 길쭉한 초록색 가지(Thai Long Green Eggplant)가 사용되는데 길이는 약 25~30cm 정도에 맛은 순하고 달콤하며, 무척 부드러운 식감을 갖는다. 완성된 땀마크아는 삶은 달걀과 함께 바나나잎에 싸서 포장되는데, 전통적으로 찹쌀밥과 함께 먹는다. 조리법 타이산의 길쭉한 초록색 가지를 준비하여 녹색 고추, 샬롯과 함께 양면을 구워준다. 절구에 씨를 뺀 녹색 고추와 샬롯, 마늘을 넣어 으깨준 뒤, 여기에 토막낸 가지를 넣어 한데 으깨어 준다. 소금으로 간을 하고 잘 섞어준 뒤 내용물을 약 두 시간 정도 냉장 보관한다. 여기에 타이의 피시 소스인 남쁠라(น้ำปลา, nam pla), 민트, 실란트로를 넣어 잘 섞어준다. 여기에 반숙으로 삶은 달걀을 넣고 숟가락으로 으깨어 섞어준다. 완성된 요리는 접시에 담고 가니쉬로 다진 쪽파를 올린다. 땀마크아는 삶은 달걀, 찹쌀밥과 함께 먹을 수 있다.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전과 붉은광장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전과 붉은광장

13세기 이래로 러시아의 주요 역사적, 정치적 사건과 연관이 있는 곳으로 14세기~17세기 사이에 건축되었다. 왕자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종교의 중심지였다. 모스크바 크렘린궁전과 붉은광장은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수백 년 동안 러시아 권력의 중심지였고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격동의 무대였으며, 러시아 건축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이다.  크렘린(Kremlin)은 원래 러시아어로 성채(城砦) 또는 성벽(城壁)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이다. 하지만 대문자로 시작할 때는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전을 의미한다.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은 오랫동안 러시아 황제의 거처이자 러시아 정교회의 중심지였으며, 현대에 와서는 구소련 정부 청사로 활용되었다. 12세기 모스크바 공국을 세운 유리 돌고루키 공(公)이 목책으로 세운 요새가 크렘린 궁전의 기원이다. 14세기부터 석조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국력의 신장에 따라 증축을 거듭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현재는 20개의 성문을 갖춘 삼각형 모양의 성벽 안에 궁전과 사원, 탑, 관청 등 많은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크렘린궁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들은 대부분 러시아 정교회 사원이다. 모스크바 총주교의 무덤이 있으며,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우스펜스키 성당, 황실 무덤이 있는 아르헹겔리스키 성당, 황실 예배당으로 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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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싸움

안시성싸움

645년(고구려 보장왕 4) 안시성에서 고구려와 당나라 군대 사이에 벌어졌던 치열한 공방전(攻防戰). 안시성은 당시 인구 약 10만에 이르던 고구려의 영지로,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하이청[海城]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이다. 643년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라는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차후 신라를 침범하지 말도록 권유하였으나 고구려가 이에 불응하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영류왕(榮留王) 살해 및 대신(大臣) 학살사건의 문책을 표방하고 644년 11월 당 태종 친솔(親率)의 10만 고구려 원정군을 일으켰다. 이듬해 4월부터 개모성(蓋牟城:瀋陽 동남쪽) ·비사성(卑沙城) ·랴오양[遼陽] ·백암성(白巖城)을 차례로 점령한 당군은 6월에는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高延壽),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을 대장으로 한 15만의 군사를 안시성에 보냈다. 많은 군사에 당 태종은 두려워하며 기만 전술을 펼쳤다. '당은 교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왕을 시해한 신하를 문죄하는 것이므로 고구려가 신하의 예를 다하면 잃은 땅도 회복될 것'이라고 두 사람을 기만하였다. 고연수가 이 말을 믿고 있다가 공격해 온 당나라 군에 대패하여 3만여 명이 전사하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항복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이세적(李世勣)을 시켜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그 휘하 장수 도종(道宗)은 먼저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안시성 남쪽에 토산(土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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