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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7세

클레오파트라 7세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왕조 최후의 여왕(재위 BC 51∼BC 30). 카이사르와 인연을 맺고 복위하였으며 안토니우스와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인연을 맺어 결혼하였다. 두 로마의 영웅을 조종하여 격동기의 왕국을 능란하게 유지해나갔다.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은 마케도니아의 왕가,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이 이집트에서 애용한 여성의 이름이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오보에를 부는 왕)의 둘째 딸로서, BC 51년 이후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이집트를 공동통치하였다. 그 후 한때 왕위에서 쫓겨났으나, BC 48년 이집트에 와 있던 G.J.카이사르를 농락하여 인연을 맺고 복위하였으며,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카이사르와 싸우고 죽은 뒤인 BC 47년에는 막내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재혼하여 공동통치하였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낳아,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라 불렀으며, 그녀는 한때 빈객으로서 로마에 가 있었으나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 이집트로 돌아왔다. BC 41~BC 40년 M.안토니우스와 소아시아의 타르소스 및 알렉산드리아에서 인연을 맺었다. BC 37년 옥타비아누스와의 협조가 결렬된 안토니우스는 재차 그녀 앞에 나타나 결혼함으로써 두 사람의 정치적 ·인간적 유대가 심화되었다. BC 34년 안토니우스는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에게 로마의 전체 속주(屬州)를 주었다(알렉산드리아의 기증).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와의 대립은 BC 31년의 악티움 해전으로 번졌으며, 이 해전에서 그녀와 안토니우스 연합군은 패배하였다. 그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와 재기를 꾀하였으나, BC 30년 옥타비아누스군의 공격을

파파스 아루가다스

파파스 아루가다스

감자를 소금물에 삶아 먹는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의 전통음식이다. 작은 감자를 소금물에 삶아 먹는 음식이다.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에서 유래한 전통 요리이다. 이때 스페인어로 파파(papa)는 ‘감자’를 뜻하며, ‘아루가도(arrugado)’는 ‘주름진’을 뜻한다. 파파스 아루가다스라는 명칭 자체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자란 다양한 품종의 감자를 뜻하기도 한다. ‘파파스 안티구아스(Papas antiguas)’, ‘파파스 보니타스(Papas bonitas)’라고도 한다. 스페인의 전채 요리인 타파스로 먹을 수 있으며, 고기 요리나 생선 요리에 곁들이기도 한다. 카나리아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이기도 하다. 기원 음식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으나, 16세기의 스페인 원정대에 의해 유럽에 감자가 전파된 이후, 카나리아 제도에서 농업이 번성하였고 당시 지역에서 바닷물에 감자를 삶아 생선 등과 먹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재료 요리에 활용되는 감자는 한 입에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것을 활용하는데 주로 지역의 고산지대에서 재배되는 단맛이 돌고 단단하면서 부드러운 질감의 감자를 활용한다. 감자의 속은 누렇거나 분홍빛이 돌며, 껍질은 어두운 색을 띤다. 파파스 아루가다스는 소금에 찍어 먹거나 올리브오일, 레몬, 식초, 마늘, 고추 등을 첨가하여 만든 모호(mojo) 소스에 찍어 먹는 것이 보통이다.  조리법

포츠담·베를린의 궁전과 정원

포츠담·베를린의 궁전과 정원

독일 베를린과 포츠담에 있는 궁전과 정원 유적. 포츠담을 중심으로 베를린까지 이어지는 500헥타르 넓이에 위치한 여러 개의 정원과 공원, 그 안의 150여 개의 건축물들이 복합적으로 묶여 199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곳곳에 건축물과 정원 등을 조성하는 형식으로, 18세기 중반 프리드리히 2세가 상수시 궁전을 지은 것을 시작으로 19세기까지 프로이센 제국의 왕후들이 지속적으로 건물을 짓고 조경에 관심을 쏟은 결과물이다.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눈길을 끄는 건물들, 숲과 분수, 오솔길 등이 어우러진 편안하면서도 아름다운 합작품이다.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상수시 궁전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손수 스케치를 했다는 여름 별장으로 상수시(Sans souci)는 프랑스어로 ‘근심이 없다’는 뜻이다. 1745~1747년에 건립되었으며, 프랑스를 좋아했던 왕이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하여 만들어 ‘프로이센의 베르사유’라 불린다. 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고 푸근한 것이 차이점이다. 앞의 대분수에서 6단의 테라스를 지나 약 20미터 올라간 곳에 세워진 길이 97미터의 단층건물로, 편안한 로코코 양식의 진수를 볼 수 있으며, 문학과 철학, 예술을 사랑했던 왕의 면모가 곳곳에 묻어난다. 왕이 직접 플루트를 연주했던 플루트 연주실, 볼테르가 3년간 머물렀다는 볼테르의 방 등 내부의 볼거리도 풍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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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첨성대

경주 첨성대

신라시대에 건립된 천문대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소재하며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밑에서부터 4.16m 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이 달려 있다. 모양은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다. 30cm 높이의 돌 361개 반을 사용하여 상층부와 기단을 제외한 27단을 쌓아 올렸다.(전체 돌의 개수는 401개)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와 제25단에서 제26단까지의 두 곳에 정(井)자형 장대석(長大石)이 걸쳐 있는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다. 제27단 내부의 반원(半圓)에는 판석(板石)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板木)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다. 판석은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이다. 꼭대기에는 정자석(井字石)이 2단으로 짜여 있는데,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추분·동지·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첨성대가 제단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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